

출소 후 의미 없이 시간은 흘렀다. 그 사람은 죽었고, 복수도 어떤 의미에선 끝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옛 동료가 가끔씩 약속을 잡아 근황을 물었다. 문자에 전화... 심지어 편지까지 보내가면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치지도 않아요? 이렇게 찾아오는 거, 지겹지 않냐고. 난 그 날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떨리는 손으로 탁자를 짚곤 일어섰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나온 내가 바보지.
- 미정이, 이제 그 권혜연이가 꽃봉오리 세 개야. 기억 나? 현석 형님 딸. 권혜연. 간 큰 순경에서 꽤 경력 있는 경사가 됐어.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고.
- 유아연이 폭사당한 것도, 상일 경위님이 죽은 것도 시간이 지났으니 그냥 과거예요? 훅 털어버리면 끝나는 그런 과거? 그런 이야기 할 거면... 갈게요.
- 권혜연이 너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어떻게 할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는 서재호가 얄미웠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도 들었다.
권혜연만 아니었다면... 아이는 확실히 죽고, 자신도 함께 죽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왜 나를 찾았는지 궁금해져서 만나보겠다고 말해버렸다.
전화번호를 받아 약속은 빠르게 정해졌다. 권혜연의 휴가에 맞춰, 8월 29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 카페였다. 처음엔 내 집 앞에서 짧게 이야기하자고 제안하길래 시간이 꽤 걸릴 거라 말하고 카페를 추천했다. 주소를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기대인지 긴장인지 모를 초조함에 20분 정도 일찍 나와버렸다. 따가운 햇빛을 피해 약속 장소인 카페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 무슨....
작은 차에서 내린 건 사복을 입은 권혜연이었다.
- 오랜만이네요. 5년 만인 가요?
- 6년 반이요.
- 기억력 좋으시네요~ 더운데 타세요.
-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요?
- 조수석 불편하시면 뒷자리도 괜찮아요!
원하는 대로 밀어붙이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팀장님과 닮았다.
- 타겠다고 한 적 없는데.
- 운전은 걱정 마세요. 작년에 면허 땄거든요! 어서 타세요.
구겨지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더 이상 말싸움을 할 힘도 없어서 그냥 조수석에 앉았다.
- 호수 좋아하세요?
- 싫어하지 않죠. 근데...
- 그럼 출발할게요. 안전벨트 매세요!
- 내 말 들을 생각은 없죠?
상당히 과격하게 운전하는 권혜연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카락, 올곧은 눈에 앙다문 입. 누가 봐도 팀장님을 닮았다.
- 하고 싶으신 말 있으시면 다음 신호에 해주세요.
- 왜 날 찾았어요?
- 서로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요.
- 내가 왜 그쪽이 필요하죠?
날카롭게 튀어나간 말에 상대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면서 액셀을 밟았다. 그게 차 안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 도착했어요. 어때요? 사람도 적고, 예쁜 곳이라 같이 오고 싶었어요.
- 나이 먹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오는 게 어때요? 무슨 데이트도 아니고.
- 데이트 싫어하세요?
- 참 나.
저돌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에 당황해버렸다. 우리는 천천히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근처에선 매미 소리가 울리고, 옆으로는 내 보폭에 맞춰 걷는 권혜연의 발소리가 들렸다.
- 권혜연 씨.
- 말씀하세요.
- 사실 알고 있어요. 나를 살린 게 아니라 그 애를 살린 거죠? 어쩌다 보니 나도 살아있는 거고.
- 네?
- 맞잖아요.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내 팔을 잡았다. 몇 초간 입술을 달싹이더니 마침내 소리를 냈다.
- 죽어야 하는 사람은 없어요. 단지 잘못 선택했을 뿐이에요. 옳은 방향을 다시 찾고, 그 길을 선택해서 집중하면 되잖아요!
-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렇게 말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죽었어야 한다는 말은 틀렸어요. 전 오미정 씨가 필요해서 여기로 왔어요. 그 이상일지도 몰라요. 사랑 같은 무거운 말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권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 이기적이라 죄송해요. 전 오미정 씨가 필요해요.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느낌, 얼마만이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미친 듯이 에너지를 쓰고 싶어 지다가도 한 없이 바닥으로 추락했었다. 주변인은 다 떨어져 나가고, 서재호도 예전의 나로 돌아가길 바라며 찾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권혜연은 지금의 내가 필요하다.
-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이젠 모르겠어요. 근데 하나는 알 것 같네요. 나도 혜연 씨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낸다. 욕심 많은 다람쥐 같은 표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 좋아요. 경사님.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죠?
- 감사합니다! 차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 가는 길에 편의점 좀 들러요. 술 좀 사야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