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은 어때?”
“살만해요.”
정은창은 식탁에 앉으면서부터 손을 무릎 위에서 쥐었다 폈다 했다. 식탁 아래로 가려져 있었지만, 현석은 취조실에서 용의자를 대할 때의 감으로 은창의 행동을 알아차렸다. 혹시 긴장했나? 아니면, 나한테 개인적으로 신경 쓰이는 게 드디어 생겼으려나.
“어떻게 보답해드려야 할지...”
“집세 받겠다고 준 곳 아냐. 돈 갚는 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날도 더운데, 이왕이면 거기서 시원하게 있고.”
“... 고맙습니다.”
은창이 조심스레 끄덕였다. 현석은 지금이라도 은창이 사적인 질문을 꺼내주길 바랐다.
“그래도... 마냥 붙어있긴 양심이 아파서요.”
“고마우면 지금처럼 자주 오든가. 솔직히, 밖에서 시원한 거나 같이 먹자 할까 하다가 체력이 달려서 그만뒀거든. 너더러 꼭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한 나도 양심 없으니까, 음, 그럼 너도 양심이 아픈 상태로 내가 준 거처에 잘 붙어있으면 돼.”
이게 무슨 말이람. 현석이 차가운 녹차 담긴 유리잔 옆면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사랑 앞에 장사 없는 처지를 열아홉 살 때 과속하면서 뼈저리게 깨달아놓고, 또다시 안타까운 출발선을 스스로 그어놓고 뛰어가고 있단 기분이 들었다. 서울지방경찰정 권현석 경감은 경찰 정보원으로 활동해주었던 정은창을 짝사랑하는 중이었다.
“잠옷은 있어?”
“네?”
“날씨도 더운데, 바깥에서 입고 온대로 자긴 좀 그렇잖아.”
현석에겐 딸이 있고, 은창에겐 여동생이 있었다. 은창의 여동생은 불운한 사고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현석은 행운을 격려받아야 했던 때에 홀로 아이를 안고 묵묵히 여자를 기다렸었다. 결국 자리를 지키고 남은 사람은 반려자 없는 현석과 외로운 은창이었다. 무엇에 공감했을까? 현석은 은창의 외모에 어느 순간 반해버렸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더 이전의 감정을 자각하면서 온 가슴에 시큰한 통증을 겪었다. 아스팔트 바닥이 이글이글한 것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슬픔이란 감정. 은창을 보면 슬펐다. 은창이 슬퍼해서 자신도 슬픈 거였다.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슬프지 않은 은창을 보고 싶다. 그저 소소하게, 한여름밤 더운 마루에 눕거나 앉아 노곤노곤한 이야기를 나눌 사이가 된다면...
솔직히 말할게. 너랑 같이 있으면 소중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어. 외모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널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이게 쉬운 감정이라는 기분도 더는 억지로라도 끌어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애아빠 된 아저씨가 영 철이 없지... 지금도 내 마음이 더운 건지 여름이 잘못하는 건지 모르겠어.
현석은 머리와 가슴에 떠도는 감상들을 정리해두지 못한 채 꼭 자고 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은창이 대답할 만한 틈도 없었다. 현석은 안방 문을 닫고 등진 다음엔 큰 숨을 들이쉬고 손바닥으로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노란 국화꽃 말려놓은 것처럼 누르스름한 전등 불빛이 천장에서 아른거렸다. 이제는 은창이 찻잔의 테두리를 검지로 만지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외로워하던 얼굴, 이따금 수줍어하는 것처럼 귀끝을 붉히던 모습, 나와 혜연이 앞에서만 순하게 변해가던 눈빛.
전부, 소중하단 걸 말해주고 싶어.
현석이 안방 장롱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내 보였다. 금반지였다.
“정말로 돌잔치 때 장만하진 않았어. 말했다시피, 고등학교 때 혜연이가 생겼거든. 혜연이가 유치원도 가고, 초등학교도 좀 다니고 나서야 살 수 있게 된 거야. 근데 혜연이가, 최근에 이걸 보여주니까 굳이 이걸 돌반지 삼지 않아도 괜찮다면서, 나더러 그냥 하고 다니라지 뭐야.”
현석이 애틋한 미소를 짓고 반지를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은창도 비슷한 마음인지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껏 마음을 담아서 보관해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맙다나. 마음씨가 참 곱지?”
“기특하네요. 웬만한 어른보다 낫습니다.”
은창이 어깨를 으쓱이고 멋쩍게 말을 이었다.
“저만 해도, 경감님께 빚지기만 하고 있으니까요.”
풋풋하면서도 연한 미소가 그 나이대 청년다우면서도 보통처럼 맑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험하게 살아와서 그런 걸가. 현석이 손에 반지를 쥐고 은창을 보았다. 은창은 몸에 딱 붙는 검은 반팔티 차림이었다. 달라붙는 옷을 준 건 사심이 맞지만, 까만 건 은창이 평소에도 충분히 입고 다니는 색이었던 걸 상기하니 괜히 까만 걸 골랐나 싶었다.
“혜연인, 널 별로 경계하지 않더라.”
“좋은... 거겠죠?”
“흠. 좋다기보단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엄연히 외간 남자 들여오는 일인 건데, 오히려 경계심이 너무 없다 싶기도 하고. 물론 멋대로 널 초대해오는 내 잘못이 먼저긴 한데... 뭐. 어쨌든.”
가족과 화목하게 살지 못한 은창에게 가족의 따스함을 알려주려고 이렇게 집에 자주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에도 은창이 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초심은 여전했다. 그저, 조금만 더, 약간은 야한 게 끼어 있을 뿐인 거야. 현석이 걸음걸음 다가와서 은창을 마주 보고 섰다.
“나도 널 경계하는 편은 아냐.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
“손 줘 봐.”
“손이요...?”
“그래. 손.”
현석이 자신의 손을 먼저 내밀었다. 은창이 머뭇거리면서 자기 손을 올려두었다. 현석은 피식 웃고 은창의 눈앞에 반지를 들어 올렸다. 선선한 색이 도는 연보라색 눈동자가 짧게 반지를 보고 현석에게로 향했다.
“궁금하지 않아? 오늘 굳이 안방까지 데려와서 옷 갈아입힌 이유랑, 반지 보여주고, 맨날 자고 가라고 했으면서 또 자고 가라고 하고, 계속 딸 얘기하는 거.”
“그, 글쎄요. 뭔가, 의도가 있으시단 건가요...?”
은창이 어색하게 눈치를 살폈다. 이런 걸 보면 어린 태가 나긴 난다. 현석이 부드럽게 웃음 짓곤 천진한 이야기꾼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래. 내가 널 선택하면서부터 숨겨놓은 의도가 있어.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반드시 오게 되도록, 집중할 거고.”
현석이 사르르 녹는 빙수 얼음처럼 눈꼬리를 휘었다. 실제로 단팥 같은 단맛이 묻어나갔기를 바랐다.
“어휴. 덥다. 옷을 너무 두껍게 입었나?”
현석은 뒤늦은 타이밍에 눈을 돌렸다. 하여간에 정은창 저건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잠옷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신데요?”
“집주인이 덥다면 더운 거야. 침대에 앉아 봐. 선풍기나 틀어줄게.”
현석이 손바닥으로 은창의 왼가슴을 탁 쳤다. 금속이 느껴졌다. 은창이 현석의 하얀 손등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현석은 답답함을 미간 사이로 꾹 구겨놓고서 은창의 손을 확 끌어와 그의 왼가슴 밑으로 두었다. 현석이 손바닥을 떼자 금반지가 은창의 손 중앙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이거, 채무야. 돌려달라고 할 때까지 네가 들고 다녀.”
“네?”
은창이 머뭇거리며 보았다.
“경감님. 사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
현석은 쇄골이 보이게끔 풀어 놓은 잠옷 단추가 부디 야릇하게 전달되길 바랐다. 아니, 더위 때문인지 뭔지, 머리가 너무 뜨거워서 생각을 더 못하겠어!
“... 지금은 몰라도 돼. 내가 너한테, 나중에 가르쳐줄 거야.”
현석이 두 손으로 은창의 가슴을 가볍게 토닥이고 돌아섰다. 은창이 무어라 말하려는 것도 모르고 손으로 뒤통수를 쓸면서 돌아섰다. 이것도 꼴갑이긴 꼴갑이었다. 등에 나는 땀이 식은땀인지 더워서 나는 땀인지도 모르겠다.
현석은 은창과 침대 테두리에 나란히 앉아서 선풍기 바람을 맞았다. 혜연이가 언제 오더라. 괜스레 긴장하며 시계를 봐도 은창은 줄곧 소소하게 말을 나누었다. 그러다 잔잔하게 미소 짓고 현석을 바라보곤 했다. 현석은 모른 채 꿍얼거렸다. 정은창, 쟤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계속 쳐다보고만 있지. 정은창이 권현석이 손부채질할 때 선이 곱게 강조되던 흰 손목을 굉장히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걸 간과한 투정이었다.
저녁이 참 덥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