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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 정은창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아주 심플하고도 단순했다. 파라솔이 만든 그늘 아래인데도 지면에서 반사되는 열 때문인지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쪄죽지 않을까. 고구마나 옥수수처럼. 후끈한 열기를 견디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에라도 들어가면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이 나이 먹고 물에서 아이마냥 뛰어 놀긴 민망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저만 하는 양 제 나이 또래부터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짠 바닷물에서 놀고 있었다. 정정하자면, 노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이제와 이미 놀고 있는 일행한테 가서 끼기도 어색했고. 무릎을 끌어안고 더위를 견디는 은창의 뒤로 그림자가 다가갔다.

 

“앗, 차거…!”

뺨에 와 닿은 차가운 느낌에 은창은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다. 거의 뛰어오른 은창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현석이 음료수를 한아름 든 채 웃었다. 사람 놀라게 장난은. 은창은 밖으로 내놓지 않은 말 대신 입술을 삐죽였다. 얼음이 가득한 아이스박스를 연 현석은 공수해온 음료수를 차곡차곡 넣으며 물었다.

 

“뭘 멍 때리고 있어?”

“그냥요. 경감님은요? 물에 안 들어가요?”

“난 이제 체력이 딸려서 말이지.”

은창의 옆에 앉은 현석이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바닷가에선 혜연과 아연, 그리고 상일이 서로에게 물을 튀겨대며 놀고 있었다.

 

“상일이가 애들이랑 참 잘 놀아줘.”

 

그치? 라며 덧붙이는 현석에게 은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상일은 지치지도 않고 혜연과 아연을 놀아줬다. 손으로 물총을 쏘기도 하고 빗나가지 않게 비치볼을 튕겨주기도 하다가 물을 뿌려 공격했다. 혜연과 아연은 쉼 없이 깔깔거렸다. 정말 지치지도 않네. 은창은 현석이 내민 음료수 한 캔을 받아 깠다.

휴가를 제안한 건 현석이었다. 특별히 할 일 없으면 같이 가자는 말에 제가 낄 자리인지 물었지만 현석은 당연하다는 어조로 말해왔다. ‘왜 가면 안 돼? 당연히 가도 되지.’ 가족들 가는 자리에 끼는 게 영 어색하다 했더니 현석은 입술을 앙 다물고 등을 세게 쳐 왔다. 사례가 들려 켈록거리자 금방 사과해왔지만 현석은 번복하지 않았다. 아예 꼭 같이 가자고 말해와 거절하지도 못하게 됐다. 은창은 미지근해져 가는 탄산을 목구멍으로 시원스레 넘기고 빈 캔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현석은 한쪽에 있던 혜연의 부채를 들더니 살랑살랑 부쳤다.

“여기도 덥네.”

“물속이 더 시원할 걸요?”

“그렇긴 해.”

다만 새카맣게 타는 건 싫다며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좀 쉬고 싶기도 하고.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끊겨버린 대화에 은창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리를 굴렸다. 같이 공감할 수 있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주제. 열심히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은 채 침묵만 길어졌다. 대홧거리를 찾아 끙끙대는 사이 현석이 은창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붙더니 은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갑작스런, 그것도 현석의 쪽에서 먼저 해 온 스킨십에 은창은 당황해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구겼다. 애들이 봐요. 어수룩한 말이 튀어나왔다. 현석에게 먼저 스킨십 하는 건 늘 자신이었다. 그것도 애들, 주로 혜연이 없을 때, 조르고 조른 다음에서야 현석은 받아주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먼저 스킨십이라니. 현석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힘들어서 쉬나 보다 하겠지.”

구겨진 음료수 캔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은창이 갈 곳 잃은 손을 어찌하지 못하고 현석의 머리에 얹었다. 토닥토닥. 아이를 재울 때나 할 법한 부드럽고 애정이 담긴 손짓에 현석이 쿡쿡 웃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현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같이 오자고 했는지 알아?”

“왜 같이 오자고 했는데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현석은 볼멘소리로 말했지만 고개를 바로 하진 않았다. 여전히 은창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로 현석은 말했다.

 

“너와 같이 오고 싶었어.”

 

데이트, 하고 싶었거든. 이어지는 말은 은창도 예상하지 못했다. 현석은 주변을 더듬거려 은창의 손을 찾아 쥐었다. 은창은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파고 들어오는 손을 맞잡지도 못하고 현석을 토닥이는 손을 내리지도 못했다. 어느새 더위는 뒷전이었다. 여전한 후끈함은 은창의 신경 밖으로 내몰렸다. 은창이 아무 말도 없자 현석이 물었다.

 

“싫어?”

은창은 고개를 젓다가 현석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제야 은창은 현석에게 잡힌 손을 의식했다. 손을 마주 잡자 이번엔 시선이었다.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인가 비슷한 위치에 온 시선이 엉키듯 얽혔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나 사람들이 즐거움에 차 지르는 비명 소리가 서서히 감소되더니 아예 밀려났다. 그것들보단 현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르고 차분하지만 지금 뛰는 제 심장소리 만큼이나 격정적인.

 

“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웠다. 홀린 듯 현석의 입술을 쳐다보고 있자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차려, 정은창. 혜연이랑 아연이도 있다고. 은창은 머릿속에 울리는 말에 따르면서도 한편으론 무시하고 싶었다. 언제 손을 내렸더라. 은창은 현석을 토닥이던, 이제는 갈 곳 잃은 손을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현석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까. 어쩐지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빤히 보는데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현석이 맞잡은 손을 당겨왔다.

 

“!!!”

부채로 시야가 가려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이 맞닿아 있었다. 은창은 지금 이게 현실인가 고민했다. 부채로 가리고 현석과 입술을 맞대고 있는 이 상황이 마치 거짓처럼 느껴졌다. 닿은 입술이 뜨거워. 입술을 조금 벌리자 현석의 혀가 침범해왔다. 그제야 은창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은창은 조심스럽게 밀려들어온 혀를 마중했다. 혀는 부드럽게 치열을 훑고 뭉클한 살덩이를 누른 다음에야 천천히 물러났다.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은창은 현석의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불그스름한 뺨이 눈에 띄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현석이 부채를 내렸다.

 

“아무튼, 데이트 하고 싶었다고.”

 

은창은 다시 놀아볼까, 라며 일어서는 시늉을 하는 현석을 붙잡았다. 현석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귓가가 빨개져 있었다. 잡힌 손을 꼼지락거려 빼낸 현석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그 다음은 방에서.”

 

뛰어가는 현석을 은창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도 있다는 말에 서서히 가슴이 설렜다. 은창은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박스에 들어있던 음료수를 하나 꺼냈다. 소름끼칠 만큼 차가운 캔 표면을 볼에 댄 은창이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 봤다. 다행이다. 아직 잠잠하니. 밖인만큼 공공예절은 지키고 싶었다.

 

“오빠─!”

 

크게 손을 흔들며 자신을 부르는 혜연에게 마주 손을 흔든 은창은 자신도 놀이에 끼라는 뜻임을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물품들은 따로 챙겨놨으니 괜찮을 테고, 뭣보다도 몸에 오른 열을 좀 식히고 싶었다.

 

“지금 갈게!”

 

큰소리로 대답한 은창이 파라솔 밖으로 나왔다. 같은 장소일 텐데도 어쩐지 파라솔 밖은 조금 전보다 더 온도가 내려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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