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적거리는 구둣발에 물웅덩이가 흙빛이 됐다. 앞을 보기도 무섭게 퍼붓는 장맛비는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도 멈출 줄을 모른다.
“……비 온다는 소리는 없었다고.”
셔터 닫힌 슈퍼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젖은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물을 먹어서인지 의도하던 방향으로 날아가, 남자는 튕겨 맞고 떨어진 걸 다시 주울 필요가 없음에 안도했다.
여름 장마에 비 소식만을 믿고 나다니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손에 장우산을 든다는 건 생각보다 거추장스럽고, 이런 일을 하는 데 비 맞는 것쯤 별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는 날은 다르다. 검은 바지 끝이 불그죽죽하여 빗물에 다 번진 꼴을 누구에게 보일 수 있을까.
남자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무시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도 안 가지고 다니냐며 핀잔을 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절대 그런 의도를 내비칠 수 없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들었다. 해가 지나면서 아주 조금의 성장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숨을 한 번 쉬고, 불 켜진 길 너머의 가게까지 냅다 달렸다. 그런다고 피해 갈 수는 없겠으나, 걸어서 맞는 폭우는 기분이 더러웠다.
“계산이요.”
엉망으로 구겨진 지폐를 받아 든 청년이 그를 몰래 힐끔거렸다. 시선을 느낀 남자는 이 앳된 청년이 무언가 위험한 것 앞에서 뒷걸음질도 못 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새 우산은 그 살이 튼튼해 펴지는 소리도 요란했다. 빗물에 먹힌 소음 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날이라 해도, 사람이 너무 없었다. 고요했다. 오르막길이 시작되자마자 이상하게 걸음이 빨라진 느낌이다. 곧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왼쪽 좁은 돌계단으로. 이상하다. 분명히 이 길은 너무나도 익숙한 그 경치였다. 그럴 리가 없다. 무너진 폐허는 버려졌고 우리는 그 안갯속을 벗어나 차라리 길바닥을 선택했다. 그러니 곧 그 애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여긴 어디지?
“은서야.”
지금 보여서는 안 될 그리운 철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다. 현실이 아니다. 사실적인 풍경에 홀린 탓이다. 그렇다면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은서야.”
입 밖으로 내뱉는 이름이 낯설었다. 한참동안이나 불러볼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남자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입가에서 시작되는 균열이 뺨을 타고 오른다.
흉터, 언제 생겼지. 누굴 대신해서, 어떤 이름으로, 어느 시간을 살다가. 남자는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철문을 두렵게 바라보았다.
“……있어? 거기, 있는 거야?”
이마에 맺혀 떨어지는 것이 땀이며 빗물이었다가 어느새 핏빛을 머금고 얼굴을 적셨다. 너는 누구야.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제 또래의 성인 여성이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청록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삐친 채, 새벽 같은 눈동자가 저를 향한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도 아니었다.
“오빠, 돌아, 온 거야?”
남자는 이 새카맣게 잠긴 세상에 계속 갇혀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 여름만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겨우 웃었다.
“응. 왔어……. 왔어, 은서야. 금방 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