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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는 게 느껴졌다.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레 다가온 인기척이 그저 고깝기만 했다. 나는 어이없이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장난은 재미없네요 은창 씨.”

 


그 말에 어깨를 감싸던 차가운 감촉이 사라졌다. 자기도 찔리긴 한가보지. 나는 여기로 불러낸 이 사람에게 단단히 한 소리 해줄 생각으로 뒤돌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철근이 쌓여있는 공사장의 모습만 날 반겨줄 뿐이었다. 은창 씨? 기분 나쁜 예감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봐도 보이는 건 오로지 천으로 뒤덮인 이름 모를 기계와 건축자재들 뿐이었다. 나는 쌓여있는 자재 사이사이를 지나며 그를 찾았다.

 


“장난치지마. 어디 숨었어요?”

 


괜히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라며 한 마디 덧붙인다. 밤바람이 스산하게 울렸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까 내가 느꼈던 차가운 손은 착각인 것만 같았다. 나를 이 곳으로 불러낸 사람이 장소에 없는 것도 모자라 악질적인 장난까지치니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다. 간만에 먼저 만나자고 문자하길래 드디어 나하고 그럴 마음이 생겼나 싶었는데. 그에 대한 실망만 늘어간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1시 53분이었다. 곧 날짜가 바뀔텐데……. 그래, 애초에 12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니 곧 장난은 그만 두고 날 이 거지 같은 공사장에 불러낼 이유를 잘해줄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한 높이의 건축자재 위에 걸터 앉았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강한 비린내.


이게 뭐지?


놀란 마음에 천을 들춰봤으나 평범한 철근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봐도 아까와 같은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착각이라기엔 상황이 찝찝했다. 결국 앉아서 기다리는 건 포기하고 아픈 발을 격려하며 일어났다.

 


“시체라도 있는건가.”

 


시체. 그 단어를 내뱉자 오싹함이 전신을 훑는다. 아무리 사람 죽는 꼴 옆에서 보는 직업이라고 해도, 그런 단어는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고작 오 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12시에 만나자고 시간에 딱 맞춰 올 생각인지. 참 매너가 없다며, 또 괜히 혼자 투덜거렸다가 공사장에 울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역시 데이트를 이런 곳에서 하는 건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이 공사가 고급호텔을 짓기 위한 공사라지만.


나는 문자로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문자함으로 들어갔다. 먼저 집에 가서 쉬겠다는 내용을 보내기 위험이었으나,

 


“응?”

 


아무리 찾아도 은창 씨에게 온 문자내역이 없었다. 이럴리 없다며 문자 목록을 한참 내리고나서야 은창 씨한테 온 문자기록을 찾을 수 있었으나, 내가 찾은 문자기록은, 우리가 처음 번호 교환할 때 잘 부탁한다며 한 마디씩 주고 받은 게 다였다.


은창 씨에게 전화로 물어보기 위해 문자함을 나오 핸드폰 시계의 숫자가 12시로 바뀌었다. 여름을 장식하는 풀벌레 소리가 멈췄다. 나는 세상과 단절된 괴리감을 느꼈다. 몸이 붕 뜨는 듯 기분이 허공을 헤엄쳤다. 이 곳에서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텐데. 멍하니 포크레인을 바라보다 내 뺨 위로 떨어진 물방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아냐. 은창 씨고 뭐고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비가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물방울이. 더 이상 생각을 잇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공사장 입구로 향했다. 저 멀리, 작은 술집과 싸구려 여관의 불빛들이 보였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서둘러 도시의 네온사인을 향해 나갔다. 공사장 주위로 처진 회색 가벽을 지나자마자 뒤에서


깔깔깔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천진난만하게,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는 목소리들이.


곧 풀벌레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핸드폰이 웅웅 울리며 내게 전화를 알렸다. 후들거리는 손을 뻗어 전화기를 보니 은창 씨였다. 나는 불안함을 억누르지못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은창 씨?”
“이게 무슨 소리야. 이따 그곳에서 보자니. …그보다 목소리는 왜 그래?”
내 답장을 지금 확인했는지 그가 의문을 표했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니. 은창 씨가 12시에 만나자고 했잖아.”
“그런 적, 없는데… 잠시만.”

 


은창 씨가 토독토독 거리며 핸드폰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자도 안 했고 전화도 한 적 없는데? 잠결에 그런 것도 아니고, 뭐지. 혹시 착가한 거 아니야? 아니면 정말로 무슨 일 있어?”

 


그의 상냥한 걱정에 긴장이 풀렸다. 나는 내가 겪은 일들을 열거해보다가 입술을 꾸욱 눌렀다.

 


“착각… 그럴지도.”

 


나는 무언가 더 물어보려던 은창 씨의 둣말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제야 내가 식은 땀을 흘리고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모습이 별로 보기는 안 좋았는지 길을 지나던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이런 곳에서 자면 안 돼- 그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나는 내게 건네는 무수한 말들 – 가령, 내 귀에서 속삭이고 있는 각 나라의 인사말라던가, 내 귓가에서 계속 손톱을 긁는 소리라던가 -을 무시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서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한 여름 밤의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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